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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글> 천국에서 먹은 32만원짜리 바나나

산처럼 바람처럼 2017. 7. 19. 10:29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보는 게 아니었어. 인천발 오클랜드행 12시간 비행을 견디느라 그 우울한 영화를 보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는데 악몽을 꾸었지 뭐야. 영문도 모른 채 복면 괴한들에게 쫓기는, 딱 개꿈 같은 상황이랄까? 비행기가 출렁여준 덕에 잠을 깼는데 기분이 영 께름칙하더란 말이지. 근데 개꿈이 아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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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분은 '출장'이지만 목적은 '답사'라고 말했었나? 만 쉰이 되면 지상낙원 뉴질랜드로 날아가 텃밭에 키위 심고, 트레킹 다니며 자유인으로 살리라 다짐했었지. D데이를 딱 3년 앞두고 출장 기회가 왔고, '이런 게 바로 운명이구나' 벅차하며 입국심사장으로 들어서는데 갑자기 고릴라처럼 생긴 한 남자가 날 노려보며 따라오라 손짓하는 거야. 배낭이 문제였어. 남자는 살인사건 현장을 조사하는 국과수 직원처럼 양손에 비닐 장갑을 끼고 샅샅이 훑더군. 누군가 내가 잠든 사이 마약 봉지를 넣은 걸까? 하지만 잠시 후 남자 손에 들려 나온 건, 배낭 속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 짓물러 터진 바나나였어. 고작 바나나 1개!

고릴라 아저씨는 왜 바나나를 신고하지 않았느냐고 물었어. 배고프면 먹으려고 남겨둔 건데 깜박 잊었다고 했지. 고릴라가 콧방귀를 뀌더군. "다들 그렇게 말해." 그러고는 팸플릿 한 장을 던졌어. "영어 읽을 줄 알지?" 오호, 이 불길한 예감이라니. 숫자 하나가 바퀴벌레처럼 눈에 확 달려들었지. 400! 내 해석이 맞는다면 벌금으로 400뉴질랜드달러, 그러니까 우리 돈으로 32만원을 안 내면 법정에 가야 한다는 뜻이었어. 짧은 영어로 버벅거리며 항의했지. 고작 바나나 한 개 때문에 이 많은 돈을 내야 하느냐. 애걸도 했지. 뉴질랜드 여행이 처음이라 몰랐다, 갖고 있는 현금도 없다…. 그러자 고릴라가 명쾌한 해법을 일러주더군. "카드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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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카드로 눈물의 400달러를 긁고 나온 이방인을 반긴 건, 태풍의 영향으로 오클랜드 전역에 불어닥친 비바람이었어. 날은 또 왜 그리 추운지. 홧김에 택시를 탔지. 인도에서 왔다는 기사가 말했어. "아주 비싼 바나나를 먹었군. 근데 오클랜드는 모든 게 비싸. 담배 한 개비도 1달러(800원)라니까?"

                  
 

연일 먹구름에 비 뿌리는 날씨를 뚫고 업무를 처리했지. 눈 뜨고 빼앗긴 32만원을 보충하려 끼니는 햇반과 컵라면으로 때웠고. 살기 좋은 도시 첫손에 꼽힌다더니 시내에 노숙자는 왜 그리 많은지. 남은 하루는 그냥 발 닿는 대로 걸었어. 원래는 새들의 천국이라는 티리티리마탕기 섬으로 여행하려던 건데, 도무지 의욕이 나야 말이지.

낯익은 통닭 그림을 발견한 건 어스름 녘이었어. 식당 문 열고 들어서니 "어서 오세요"라는 한국말이 들려오는데 눈물이 찔끔 쏟아지더라. 양념 반 후라이드 반을 먹어치우며 바나나 설움을 토해내자, 이민 17년 차 주인장이 "그 정도라 천만다행"이라고 했지. 호박씨 몇 알 때문에 추방된 사람도 있다며. 청정 낙원에 사시니 좋으냐 물었어. 집값은 서울의 두 배, 세금은 소득의 절반이라 돈 모일 틈 없는데, 노숙자들은 한 달 800달러의 실업수당을 받는 이상한 나라라고 하더군. "20억 정도 여윳돈 있나요? 아니면 그냥 한국에 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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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 동물원에 가본 적 있니? 비가 오면 홍학 떼의 합창도, 긴꼬리원숭이의 재롱도, 수사자의 포효도 죄다 구슬프게 들리지. 명치 끝에 끈덕지게 달라붙어 있던 불쾌감의 원인을 알아낸 건 오클랜드 동물원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버스에서였어. 백인 운전사가 2명의 중국 여성을 향해 고래고래 소릴 지르더군. 왜 과자 봉지를 들고 버스에 탔느냐며.

그래. 단지 32만원 벌금이 억울한 게 아니었어. 평생 목수로 성실히 일해온 자신을 의료보험금이나 타내려 꼼수 부리는 양아치로 공무원들이 낙인 찍자 '나, 다니엘 블레이크'가 외쳐. "사람은 자존심을 잃으면 모두를 잃는 거야." 난 자존심을 다친 거였어. 그것도 아주 심하게. 고릴라 아저씨가 날 잡범 취급하며 손가락 하나로 오라 가라 지시하는 대신, "정말 미안한데 이건 뉴질랜드를 여행하는 사람이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이야"라고 설명해줬다면 비싼 수업료 낸 셈치고 쿨하게 받아들였을 거야. 버스기사도 과자 부스러기는 차 안을 더럽히니 휴지통에 버려달라고 정중히 부탁할 수 있었어. 나 또한 타인을 저렇듯 무례하 게 몰아친 적 없는지 자책이 쓰나미처럼 밀려들더군.

모멸감! 어쩌면 이 세상 모든 부부싸움, 테러, 전쟁의 씨앗은 모멸감에서 싹트는지 몰라. 웬 오버냐고? 옹졸하다고? 너도 32만원짜리 바나나를 먹어보면 생각이 달라질 걸? 지상에 천국은 없나니. 그래도 꼭 가고 싶다면 신발 밑바닥부터 확인하길. '천국'은 네 구두 뒤축에 묻은 흙덩이도 결코 용납하지 않아.

                

조선일보 편집국 문화부 김윤덕 차장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7/17/201707170297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