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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도 말투

산처럼 바람처럼 2015. 4. 20. 09:01

 

 

1992년 가을, 오비 베어스와 빙그레 이글스 경기가 열린 잠실야구장. 관중석에 이글스를 응원하는 충청도 남자 몇이 앉았다. 줄곧 2대0으로 끌려 다니던 이글스가 9회초 대역전 기회를 맞았다. 투아웃에 터진 안타, 그리고 볼넷. 다음 타자가 장종훈이다. '호무랑' 한 방이면 끝난다. 그러나 너무 높이 뜬 공, 펜스를 넘기지 못하고 잡혔다. 실망을 안긴 선수에게 욕설을 퍼부을 법도 한데, 충청도 아저씨들 이 한마디 내뱉고 주섬주섬 일어선다. "뭐~~~~여."

▶선거 때 여론조사원이 충청도에 가서 "기호 1번이 좋으냐, 2번이 좋으냐" 물었다. 하나같이 "다들 훌륭한 분이라고 하대유" 한다. 여간해 속을 보여주지 않는 기질 탓에 후보자들은 애가 탄다. "꼭 좀 부탁드린다"는 애원에 "너무 염려 말어" "글씨유, 바쁜디 어여 가봐유" 했다면 해석은 가능하다. 전자는 '찍어준다'에 가깝고 후자는 '틀렸다'에 가깝다. 그마저도 "냅둬유" "종쳤슈"라면 상황 끝이다.

만물상 칼럼 관련 일러스트

▶사투리에 담긴 삶의 풍경을사투리에 담긴 삶의 풍경을 '방언정담'이란 책으로 펴낸 국어학자 한성우 교수는 충청도 화법을 '느린 화법'이 아니라 '접는 화법'이라고 했다. 분노에 차 하고 싶은 말이 종이 한 장 분량이라면 반을 접는다. 칭찬이라면 반의반을 접고, 사랑의 표현이라면 또 반을 접는단다. "그러고도 장종훈이 니가 홈런 타자여? 고따위로 야구 할라믄 때려쳐라" 할 수도 있지만, "뭐여~" 한마디로 접는 게 충청도 사람이란다.

▶그래서 오해도 받는다. 본심을 드러내지 않아 속을 알 수 없다, 우유부단하다, 뒤끝 작렬하다며 흉본다. 한데 충청도 토박이 입장에선 할 말이 많다. 바로 말하지 않고 에두르는 건 상대에 대한 배려다. 면전(面前)에 대고 욕을 하다니! 시시콜콜 따지며 덤벼드는 건 상것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배웠다. 충청도 말에 비유가 많은 건 그 때문이다.

▶그제 국회에서 한 의원이 성완종 리스트와 관련, 이완구 총리의 잦은 말 바꾸기를 지적하며 "'이완구 말을 믿을 수 없다'는 얘기가 있다"고 하자 이 총리는 "충청도 말투가 원래 그렇다"고 했다. 충청도 말이 모호한 건 사실이다. 예스, 노가 분명치 않다. 하지만 그건 신라와 고구려 침략에 시달렸던 백제인 특유의 지혜지, 말 바꾸기나 말장난이 아니다. 우회하되 정확히 목표물을 겨냥하는 게 충청도 말이다. 행간에 담긴 진의(眞意), 그 노여움이 얼마나 무서운지 충청도 아내와 살아본 남편들은 안다. 모르긴 해도 총리를 향한 요즘 충청 민심은 이럴 것이다. "저 냥반, 뭐~~~~여."

 

 

김윤덕 논설위원<조선일보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