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계신 여든일곱 어머니는 우리 세 식구 먹으라고 밑반찬을 보내주신다. 배추·파·열무·고구마순…. 택배로 부쳐 오는 상자 안 봉지마다 갖가지 김치가 담겼다. 아들 좋아하는 갈치속젓과 누른 돼지머리 고기, 조려 먹을 꼴뚜기·갯장어도 빠지지 않는다. 살짝 말린 생선 박대는 얼려 랩으로 감고 신문지로 한 번 더 쌌다. 살집이 여느 서대보다 얇아도 굽고 쪄 먹는 서해 별미다. 집 식탁엔 고향 먹을거리가 떨어질 날 없다.
▶여든둘 장모도 깨소금·참기름·고춧가루·미숫가루와 갈아 얼린 마늘을 부쳐주신다. 얼마 전 기력 떨어지기 전까지는 고추장·된장·청국장도 꼬박꼬박 담가 보내셨다. 몇 달 전 집에 내려갔다가 어머니가 열무물김치와 파김치 담그는 걸 도와드렸다. 시들고 벌레 먹은 채소를 솎아낸 뒤 예닐곱 번 물로 씻어 간하고…. 몇십 분 거들었을 뿐인데도 꽤나 힘이 들었다. 어머니는 "더 자주 담가 보내고 싶은데 기운이 없다"며 웃으셨다.
▶지난주 부산 어느 파출소에 신고가 들어왔다. "슬리퍼 신은 할머니가 보따리 둘을 들고 한 시간째 동네를 서성거린다"고 했다. 할머니는 당신 이름과 주소도 기억하지 못했다. 경찰에게 "내 딸이 아기를 낳아 입원해 있다"는 말만 했다. 경찰이 네 시간 걸려 딸이 있는 병원을 알아냈다. 할머니는 딸을 만나자마자 보따리를 풀며 말했다. "어서 무라(어서 먹어라)." 보따리엔 미역국, 나물 반찬, 흰밥과 이불이 있었다고 한다.
▶치매도 이기지 못하는 것이 모성(母性)인가 보다. 부산 할머니는 치매기에 문득문득 정신줄 놓으면서도 딸을 위해 미역국 끓이고 이불 장만하는 건 잊지 않았다. 엊그제 저녁 밥상에 못 보던 얼갈이배추 김치가 올랐다. 아내가 담갔다고 했다. 몇 번 김치를 담가 보다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 김치에 밀려 손을 놓았던 아내다. 아내가 대학 다니는 외동딸에게 말했다. "너 시집가면 엄마가 김치 담가줄 거야. 그러려고 이제부터 김치 담그는 법을 본격적으로 배우기로 했다." 자식 집 냉장고 채워주기도 내리사랑인 모양이다.
<2014. 9. 22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