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화순
그곳에 백아산이 있다.
멀리서 보면 힌 거위가 무리지어 있는 듯 보여 붙여진 이름
800여미터의 산이지만
암릉과 암봉
정상에 서면 사방으로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산너울
그 어느산에도 뒤지지 않는 산.
그곳에 또 마당바위가 있다.
사방이 수십미터 암벽위에 300여평의 마당
그곳에 서면 무등산, 지리산, 동악산 ,모후산, 조계산이 보인다.
봄이 되면 마당바위에서 하루밤 보내리라 다짐했었다.
백아산 관광목장에서 바라본 최근에 완공된 구름다리와 마당바위.
묵직한 배낭을 메고 산을 오른다.
오후 3시가 넘은 시간
모두들 산에서 서둘러 내려오는데
우리는 여유롭게 산을 오른다.
소란했던 산이 정적을 찾을 무렵
산정에 텐트를 세우고
일몰을 보리라.
야생란이 꽃을 피웠다.
길가에서 고개를 돌리고 피웠다.
최근 화순군에서는 마당바위에 구름다리(하늘다리)를 완공하였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찾을것이다.
산행시작한 후 새로 만든 등산로를 1시간여 오르면
능선에 붙고 곧 데크 계단이 나온다.
무등산에서 불어오는 거센 바람이 찐득한 땀을 씻어주고
사방으로 펼쳐지는 조망에 피로를 잊는다.
구름다리의 길이는 약 70여미터
거센 바람에 약간 흔들리니 현기증이 인다.
바닥에 투명유리를 설치하여 1백여미터 아래를 볼수 있는데
강심장이 아니면 오래 바라볼 수 없다.
맞은편 산에 구름다리 그림자가 모습이 적나라하다.
일명 하늘다리
6.25때 군경과 빨치산 혈투를 벌이고 결국 1천여명이 쓰러진 곳 마당바위
그 들의 넋을 기리려 <하늘다리>라 명명했다고.
이 데크에서 바라보는 산들
가히 절경이 아닐수 없다.
그때 소총을 들고 남루한 차림으로 망을 보았던 그들의 눈동자가 그려진다.
이곳이 마당바위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중 마당바위 묘사부분
"마당바위는 사방 어느 쪽에서 보나 빼어나게 생긴 바위 봉우리였다.
산줄기 위에 우뚝 치솟은 그 모습은 바위의 무게감으로 장중했으며, 위로 뻗치는 기상으로 장쾌했고,
군더더기 없는 담백함으로 수려했다.
그 자체가 하나의 어마어마하게 큰 바위였다.
그 바위는 이십 미터 이상의 위에 그냥 덩그렇게 놓인 형상이 아니고
그 뿌리를 그 거대한 바위가 산 아랫부분과 유연하게 연결을 이루어 자연스러운 조화의 아름다움을 한껏 드러내고 있었다.
그 벼랑바위 사이를 어렵사리 타서 위에 오르면, 거기에 또 하나의 경이가 펼쳐져 있었다.
삼백여 평을 헤아리는 그야말로 넓은 ‘마당’이 질펀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흙이 또한 인간의 탐욕의 대상이 되었다.
그곳이 명당으로 소문나 오랜 세월 그 언제부턴가 묘 하나가 통명산을 건너다보이는 한쪽 구석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두개도 아니고 꼭 하나인 그 묘는 인근 마을사람들의 손으로 무수히 파헤쳐져 왔다.
그런데도 다시 보면 그 자리에 봉분이 솟아 있고는 했다.
그 누구도 상여가 산으로 올라간 것을 본 일이 없었고, 시체를 넣은 관이 그 드높은 벼랑바위를 타고 오르는 것도 본 일이 없었던 것이다.
마을사람들이 괭이며 삽을 가지고 마당바위로 치달아 오르는 것은 가뭄이 심하게 들어 논바닥이 짝짝 갈라지고,
개울이 말라 붕어들이 배를 하얗게 까뒤집는 해였다.
비를 기다리다 못해 나락이 타들고, 굶어 죽게 될 위기가 닥치면 사람들은 문득 마당바위를 생각해냈다.
그것은 곧 누군가가 또 마당바위에 묘를 썼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었다.
마당바위를 치달아 오른 사람들은 으레 봉분 큼직한 묘를 발견하게 되었고, 분노한 그들은 인정사정 없이 그 묘를 파헤쳐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경건하게 기우제를 지냈다.
그 자리는 명당인 것이 분명했지만, 사람의 묘를 써서는 안되는 명당이었다.
그 자리에 묘를 써버리면 하늘에서 내리는 혈을 끊는 것으로서, 그 피해는 백아산 언저리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미치게 되어 있었다.
묘를 그렇게 파헤쳐버려도 어느 때 한번 주인이 나타나는 일이 없었다.
또, 그 묘에서는 뼈들이 나오기는 해도, 썩어가고 있는 시체가 나온 일은 한번도 없었다.
그 이상스러운 일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이기도 했다.
남몰래 도둑묘를 쓴 사람들이 얼굴을 드러낼 일이 없는 일이었고 그 깎아지른 바위 위로 관 을 옮길 수 없는 일이니까 집안의 오래된 묘를 이장시키는 방법을 썼던 까닭이다.
그런데 그 자리에 밤중을 틈타 묘를 쓰는 사람들을 꼭 어느 한 집안의 소행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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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바위에 배낭을 내리고 샘터로 간다.
샘까지는 3백여 미터.
5월이면 영혼제를 지내는 철쭉밭에 용머리 샘이 있다.
샘터의 이끼는
어지간한 가뭄에도 끄떡없는 흐름을 짐작할 수 있다
용머리 샘
샘터에서 바라본 마당바위와 하늘 다리
다시 마당바위에 올랐다.
마당바위 아래는 수십년이 넘었을 철쭉이 평원같이 펼쳐져 있다.
5월이면 이들이 소리없이 꽃 잔치를 보여줄때
많은 이들이 가슴에 그꽃보다 더 붉은 아픔을 안고 이곳에 오른다.
박영발, 김승우,조원제......
당시 전남도당을 이끌던 인물들
특히 대지주의 아들이며 면서기였던 소년 빨치산 조원제 그가 바로 신존인물 박현채.
광주서중 3학년 때 16세의 나이로 입산하여 소년 빨치산 문화중대장으로 활동하며 뻐 속 깊이 파고드는 백아산의 겨울을 지킨 어린 소년의 피끓는 청춘이 머물러 있는 곳.
산이 좋아서 그저 오르지만 이 산에는 우리가 보듬어야 할 우리 형제들의 혈투와 생존의 몸부림이 있었던 곳이다.
군경이 마당바위를 빼앗고고 이틀후 다시 유격대가 점령하며 군경 480여명이 숨을 거두고..
다시 일본 오키나와에 있던 미공군 전폭기의 공중폭격지원을 받아 비로소 빨치산이 스러져 버린 곳이 바로 마당바위다.
지금은 산새소리 맑고 새로난 하늘다리에 그들과 비슷한 젊은 청춘이 포옹하고
스마트폰에 흔적을 남기지만 바로 저 산허리와 봄빛 내리는 능선마다 핏빛이 물들었던 곳,
백아산은 그래서 지금도 조심스럽다.
다시 5월이면 그 핏빛이 철쭉으로 온산에 물들겠고
그때는 막걸리 한병 메고 다시 올라와야 맘이 편할 것 같은 산
하루해는 무등산 너머로 내려가고
몇잔의 술과 안주에 몸을 부렸다.
아늑할 것 같았던 산정엔
밤새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은 마치 사람이 텐트를 흔드는 듯
조심스럽기도 했고
텐트를 날려버릴 듯 거세기도 했다.
깊은 잠을 못 이룬 것은
부족한 술 기운 탓만은 아니었다.
누군가 밤새 텐트 옆에서 떠 도는 것 같았다.
아침
길고 긴 밤이 가고
다시 아침이 밝는다.
멀리 무등산아래 마을도 잠에 서 깨고
밤새 웅웅거리던 바람도 이젠 잦아들었다.
그때도 산에서 바라보는 시골마을은 저렇게 평화로워 서러웠겠지.
백아산 옆으로 하루해가 오르고
잠자리 흔적을 정리하고
백아산 정상으로 향한다
마당바위에서 정상까지는 1킬로 남짓.
일명 매봉이라 불리는 정상
막걸리 한잔 사방에 붓고 모후산을 바라본다.
모후산.
다시 왁자지껄
형형색색의 등산객이 산을 오르는 시간
가벼워진 배낭과 무거워진 머리로
난 산을 내려간다.
군경이
그리고 빨치산이 잠든 그자리
이 땅위에 진달래와 생강나무가 봄을 알리는데
그 수수한 색이 서럽다.
2014년 봄이 오는날 백아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