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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산은 도피처가 아닌 안식처이고
피난처가 아닌 고향집과 같은 것이었다.
입대전 학교생활이 그랬고
취직후 직장생활을 하면서도그랬다.
힘들고 버거울 때마다 훌훌 털고 산에 갔다.
그렇게 산은
내겐 그런 존재였다.
가을이라 그런가?
하는일도 식상하고
맘대로 풀리는 것도 없고
누가 건드리면 바로 폭발할 듯한 날카로운 신경
팽팽한 활시위 마냥 긴장된 하루들이
숨이 막혀
생각한 곳이 두류능선.
그믐이 가까운 달빛 없는 능선에서
별을 보고 싶었다.
국골의 물소리가 듣고 싶었다.
많은 곡이 담긴 스피커와 술을 챙겼다.
럭셔리한 취침을 위해 침낭도 따뜻한 걸로
가슴이 설렌다.
"여행은 가슴이 떨릴 때 떠나라, 다리가 떨릴 때 떠나지 마라."란 그말이
문득 떠올라 벌써부터 두근대는 가슴.
그래!
아직은 20킬로가 넘는 배낭을 메고 지리를 오를 수 있고
산정에서 무수한 별빛을 바라볼 생각에
가슴이 떨린다.
떠도는 바람처럼
능선 한 곳에서 맘껏 즐겨 보리라!
즐기다 지치면
허허로움을 배워보리라!
2일 오후
추성리
그리고 광점동에서 얼음터 가는 길을 걷는다
이 길은 의신에서 대성골 가는 길과 닮았었는데.
산모퉁이를 돌고
계곡물소리가 가까워서 그렇고
억세지 않은 경사 오솔길이 그랬는데
아쉽다.
가을 햇살이 따갑다.
어름터 여기에
아랫 세상일은 내려놓기로 했다.
스마트폰을 끄고
경사 심한 길을 오른다.
단순한 오름짓에서
휑하니
아니 머리속이 텅 비어버리는
개운함을 맛본다.
산을 오른다는것
복잡한 그 모든 것을 잊고
코끝에서 떨어지는 땀과
허벅지의 터질듯한 고통과
하늘이 노래지는 그 뻑쩍지근하고
빡센 숨가쁨
그 단순함에서
비로소 희열을 느끼고
안정을 찾는다.
사상선(事上禪)
조용히 앉아서 하는 좌선과 달리 일상생활 속에서 일을 하면서 잡념을 없애고
원래의 생각 자리로 돌아가 오롯이 그 일만 하는 원불교 고유의 수행법이 이런 것인가?
최근 운봉에서 늦은 밤까지 현판 작업을 한다.
3천원짜리 조각도로
은행나무를 파내다 보면 이마에 땀이 송글거리고
모든 잡념이 없어진다.
열린 문밖에서 가끔 들려오는 바람소리에
밤이 깊음을 깨닫고.
잡초를 뽑고 풀을 베고 무 배추를 심는 단순한 노동에서
감동은 아니더라도
잔잔한 기쁨을 느낀다
.
.
.
향운대 가는 길
능선과 계곡
다시 능선을 오르다 보면 산죽길 사면을 만나는데
지독한 안개가 온 산을 삼킨다
물을 채우기 위해 가는데
표지기 하나 없다.
거미줄 처럼 얽힌 길속에서
드디어 향운대 도착.
축축한 안개와 어둠
을씨년 스러움에 서둘러 4리터 수낭을 채우고
막바지 목적지를 오른다.
거기까지 이리 멀었던가.
축축한 안개
미친듯 부는 바람
어두워지는 날씨
지치는 몸
문득 싸늘한 두려움이
뒷덜미를 치고 흐른다.
같이 오길 잘했다.
드디어 목적지
1543봉
작년에 손질한 잠자리가
더욱 아늑해 보인다.
천왕봉과 주능
지리산은 안개속이다.
미친듯 몰아치는 바람만이
나를 반긴다.
잠자리를 마련하고
일행이 도착하고
몇잔의 술과 이야기가 오고 가는사이
안개는 씻은 듯 걷히고
두류능선에 별이 뜨고 함양읍과 음정마을의 불빛이 잡힐 듯 가깝다.
멀리서 반짝이는 산사의 불빛은 도솔암인가?
영원사인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
.
새벽 2시다
텐트를 열고 하늘을 본다
별빛이 맑다
서럽도록 맑다.
나는 왜 여기에 누웠나?
무엇이 이렇게
이 자리에 눕게 만들었나?
삶이 힘들고 고단한 만큼
이 곳에서 치유받는 기쁨도 크다.
좀더 여유를 가지고 살아야지.
텐트 밖으로 한줄기 바람이 휙 지나고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잠깐 보이는 별들이
참 좋다.
그 어느때보다 침낭이 포근하고 아늑하다.
어릴적 어머니 품 처럼.
윗 텐트속의 코골음 소리가 정겹다.
3일 아침!
달뜨기능선 위로 하늘이 열린다.
웅석봉, 동부능
서너시간만 잤는데
피로감과 숙취 모두 날아갔다!
상쾌하고 청명한 아침
지리산이어서 더 좋다.
삶이 힘들고
답답할때는 산에 올라 볼 일이다.
산에서 아침을 맞아 볼 일이다.
이렇게 찬란한 아침을........
다시 시작되는 하루
문득 생각나는 몇분께 지리산을 보내드리고
물병하나 호주머니에 넣고 하봉으로 향한다.
뻑뻑한 허벅지가
나름 유쾌하다.
잔잔히 이어지는 동화속 같은 길
굳이 하봉, 천왕봉일 필요는 없겠다.
여기가 지리산이고
여기가 가슴 설레는 그 자리이니..
말끔히 비워진 머리와 가슴속에
이 산을 가득 채울수 있겠다.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까지...
무엇보다 오늘도 내려가지 않고 산에 머물 생각에
가슴이 또 떨린다.
* 산행일 : 2013. 10. 2 ~ 3 ~ 4일
* 여정 : 어름터 - 향운대 - 두류능(1543) - 영랑대 - 청이당 - 어름터.
* 동행 : 프록켄타님 ,작은세개,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