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궁계곡 정장군 황장군
마한·진한·변한은 부족 간에 큰 전쟁이 일어났다. 진한군에 쫓기던 마한의 왕이 전쟁을 피해 문무백관과 궁녀들을 이끌고 지금의 달궁 계곡으로 들어왔다가 최후를 맞는다.
그러면 마한의 왕은 달궁(지금의 오토캠핑장)을 지키기 위해 달궁으로 들어오는 입구를 지켰을 것이다.
달궁으로 접근이 가능한 길은 남쪽은 성삼재 서쪽은 정령치 북동쪽은 산내면 뱀사골 지역이다
기록에 의하면 북쪽에는 8명의 장군을 배치했는데 인근의 재 이름은 '팔령재'다. 이는 인월에서 함양으로 가는 길이다
서쪽에는 정장군이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령치'이며, 동쪽은 황장군이 주둔했다 해서 '황령재'다. 남쪽은 중요한 요충지여서 성씨가 각기 다른 3명의 장군을 배치해 지키게 했기 때문에 '성삼(姓三)재'라는 이름을 얻었다.
문제는 황령이 어디냐 이다.
황령과 관련 만복대 인근에 있엇던 것으로 추정되는 황령암과 연관지으면 답은 얻을수가 없다.
황령암에서 황령을 바라보고 명명한것은 아닐까?
만복대 인근은 성삼재와 정령치의 중간에 위치하기에 굳이 그곳에 황장군을 두었을리가 없기 때문이다.
기록에 없긴 하지만 달궁을 공격하기 위해서 달궁으로 접근이 가장 쉬운곳은 산내면에서 내령으로 들어오는 길이고
약간 희박하지만 삼정의 영원사에서 개선마을을 넘는 방법인데 빗기재(橫 峙)가 황령이 아닌가 의심해본다.
내령과 빗기재???/
삼한의 위치는 대체로 오늘의 경기·충청·전라도 지역은 마한, 경상도 낙동강 동쪽은 진한, 경상도 낙동강 서쪽은 변한의 세력권으로 이해되고 있다
아래 지도상 북으로는 변한한테 쫒기고 동으로부터는 진한으로부터 공격을 받았을 것인데 당궁으로 접근이 가장 쉬운 입구 내령에 대해선 업급을 찾을수가 없다.
삼봉산 아래 산내면 중황리의 황치마을과의 연관은 없을까?
지금의 등구재는 창원마을과 연결되는데 굳이 창원마을로 돌아서 공격하진 않았을 것이고
진주쪽에서 함양(팔령재) 혹은 마천으로 접근하여 황령재를 지나지 않앗을까?
참고로 허재 정석구의 두류산기를 살펴보면
그 산맥은 덕유산(德裕山)에서 뻗어 내려 백운산(白雲山)에서 나눠졌는데, 남쪽으로는 3)안의(安義) 삼동(三洞)이 되고, 굽이굽이 10여리를 뻗어 내려 운봉의 고남산(古南山)이 된다. -고려 우왕(禑王) 경진년(1380)에 태조 이성계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 이지란(李之蘭)과 함께 황산(荒山)에서 왜적을 정벌할 때 이곳에 의병(疑兵)을 두었다. 그래서 세속에서는 태조단(太祖壇)이라고 일컫는다.- 그 아래쪽이 여원치(女院峙)인데 운봉과 남원을 연결하는 고개이다.
그 남쪽으로 삐죽삐죽 솟은 돌들이 마치 묶어놓은 듯 서 있는 곳은 주지당(朱芝堂)이고, 산세가 높아졌다 낮아졌다 하며 10여 리를 가다 푹 꺼진 곳이 망평(望坪)이며, 동남쪽으로 가파르게 솟은 곳이 정령(鄭嶺)이다. -고개 위에 둘레가 10여 리나 되는 오래된 성이 있는데, 「황령기(黃嶺記)」에 이르기를 “옛날 마한(馬韓)이 진한(辰韓)과 변한(卞韓)에 쫓겨 달궁(達宮)으로 피해 왔는데, 황장군(黃將軍)에겐 황령(黃嶺)을 지키게 하고 정장군(鄭將軍)에겐 정령을 지키게 하였다.”라고 하였다. 이 두 곳이 그런 이름을 얻은 것은 혹 그럴 듯하지만, 또한 무엇을 근거했는지 알 수 없다.-
왼쪽으로 산줄기가 낮아져 20~30리를 뻗어 내려 6)수성사(水聲寺)에서 멈춘다. 백운산 아래에서 운봉 . 함양 사이 남쪽으로 뻗어 내린 7)팔량재(八良峙)앞 8)만수동(萬水洞) 쪽으로 흘려보낸다. 오른쪽은 산줄기가 솟아 만복대(萬福臺)가 된다. 그 동쪽으로 낮아지는 산줄기는 황령의 주능선이고, 서쪽으로 낮아지는 산줄기가 가까이서 혈(血)을 이룬 곳이 9)파근사(波根寺 남원시 주천면)이며, .
이 산행기에서는 에선 만복대 동릉이 황령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