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에게 쓰는 편지
* 산행일 : 2011. 8. 21, 22일(1박2일)
* 산행지 : 지리산 주능선 종주(첫날:성삼재~세석, 둘째날 : 세석~천왕봉~백무동)
* 산행시간 : 첫날 11시간 30분(06:50:18:20) / 둘째날 7시간 30분(05:20:12:50)
* 동행 : 직장동료가족 및 우리가족
올해 여름은 비 밖에 다른 기억이 없다.
정말 지겹게 내리다가 잠깐 그친
어느 퇴근길
풀밭에서 귀뚜라미가 운다.
벌써 귀뚜라미 울음소리라니...
이렇게 여름이 가나 보다.
비만 내리던 2011년 여름이 가기전
휴가를 냈다.
8월 21일 22일.
지리산 종주
작은 배낭으로 당일도 가능하지만
빨리 걸은 만큼
기억도 빨리 지워지기에
이틀동안 아들과 걷기 위해 산장을 처음으로 예약했다.
방학이 끝나기 전에
한가지 추억 하나 만들어 주고 싶었다.
오래 남을 좋은 추억.
사춘기 아들을 둔 부모로서
난 할 말은 많지만 잔소리 같아 많이 참았고
저도 또한 할 말은 있겠고...
강요 보다는
함께 땀흘리며 걷다보면
저절로 자수하겠지.
지리산이 아직
낯선 동료 및 그 가족 5명도 부르고.
산행전 준비사항은 언제나 힘들다.
개스부터 먹거리 배낭까지.
당일
새벽 4시 잠에 취한 둘째가 쉽게 일어난다.
나름 각오를 했나보다.
성삼재에 또 섰다.
아들과 아내와 함께.
며칠을
아니 어제까지 이어지던 비는
다행이 "잠시대기" 상태다.
시암재 휴게소가 잠에서 깬다.
다행히 하늘은 맑고 공기는 서늘하다.
가을 같다.
노고단 고개로 향한다.
아들의 배낭엔
간식과 여벌 옷
저녁에 내가 먹을 소주 두병을 넣었다.
견딜만 한 듯 하다.
코재 전망대에서 잠시 화엄사 계곡과 구름속의 구례읍을 구경하고
바로 노고단으로 오른다.
모두 화기 애애 하지만
나름 긴장한 모습도 보인다.
노고단 대피소에서
중3이다.
어느새 나의 옷과 신발이 이놈한테 맞는다.
다른때와 달리 오늘은 의젓해 보인다.
앞서서 노고단 고개를 오르고 있다.
무슨 생각으로 오르는지......
지리산 종주를 아니 세석까지
그 힘든 여정을 알기나 하는지.
노고단 고개에 선 승유.
무얼 보고 있나?
종주, 두려움, 불안함이 사진아래 구름처럼 밀려 오는것 같아
보는 내가 더 착잡하고 가슴이 먹먹하다.
그래도 네 뒤엔 아빠가 있다.
임걸령으로 가는 길
불안한 기분은 나의 기우였고
모두 발걸음 이 가볍다.
얼마만에 보는 싱그런 햇빛인지.
오늘 이 싸한 공기의 색깔은 초록이다
아주 신선한 초록색..
어려움 없이 임걸령에 도착했다.
일요일 이어서인지
산객이 드물다.
연하천이 목적지인 사람들..
대학생 한무리.
연인.
이리 한산한 능선길이 여유로워 좋다.
가능하면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지리산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는데
" 그냥 시원한 물맛이네! "
한다.
노루목 오름길도 어렵지 않게 오른다.
동료들은 뒤에서 오고
나름대로 하루 일정을 맞춰야 하기에
걸음을 재촉해야했다.
삼도봉을 곁눈질로 지나고
잘 가꾸어진 552계단을 내려서니
몇년전 새우잠을 잤던 화개재다.
잠시 배낭을 내렸다.
일행을 기다리고
은근 부담인 토끼봉이 막고 있기때문이다.
끈적한 인내를 요구하는 토끼봉 오름길
발걸음이 무겁게 보인다.
인간의 기억이란게 얼마나 보잘것 없는지??
헬기장이 멀다.
내 배낭의 무게때문이 아니다.
정상전에 쉬었기 때문에
토끼봉 정상은 그냥 지나친다.
내림길도 그리 낭만적이진 못하다.
연하천 가는 길.
계속 내린 비에 산길은 엉망이다.
명선봉까지 길은 오름의 연속이고
묘향대가 보이는 계단에서
아들은 좀 지치고 있다.
삼각고지에서 조망을 보다가
와운마을 하산을 처음으로 생각했다.
사탕하나 물리고
걷다보니 연하천 산장으로 가는 내리막 계단이다.
라면 점심이란 말에 다시 발걸음 이 가볍다.
라면에 힘을 얻고
벽소령으로
궈궈!!
개인적으로
연하천 벽소령 구간이 젤 힘들다
조망없고
너덜길
이 길은 아들때문에 내가 힘을 얻는다.
벽소령에 어렵게 도착
선비샘이 쩌기쯤??
물을 보충해야 하는데
달랑달랑하다.
이온음료 3캔으로 목을 축이나 부족.
70여미터를 내려가 물을 떠왔다.
전기를 끌어들였으면
식수도 좀.........
물뜨러 간사이 에너지 보충 중...
일행이 도착하는 걸 보고
1킬로 이상은 차도 다니는 좋은 길이라 일러
자리를 털었다.
구절초가 만발했던 이 길
오늘은 좀 이른가 보다.
작전도로가 끝날무렵
뒤에서 빠른걸음으로 오시는 분께 길을 비켜드리는데
안면이 있으시다.
<배재길>님!
(고마우신 마음만 받았습니다. 표고버섯 고마웠습니다.)
가벼운 악수로 보내드리고.
덕평봉 아래 선비샘으로 간다.
역시 힘들땐 산길은 멀게 느껴진다.
하지만 어쩌리.
서두르지 않고 한발 두발 걸을 수 밖에.
그게 또 정답이다.
이세상 세상살이 또한 마찬가지.
선비샘에서 아들의 피로를 풀어준 놈.
10여분 잘 놀더라.
구칠선봉에 섰다
예상을 덮고 여정이 지체된다.
10시간이 넘을 것 같다.
구 칠선봉에서
앞에 서 있는 바위를 보고
아내는 좌측부분은 사자얼굴
아들은 우측을 보고 원숭이 얼굴
서로 우긴다.
사자고 원숭이고 간에
난 저 산을 넘을일이 걱정인데...
영신봉을 넘어서니
구절초가 피었다.
뭐 새로울 것도 없다.
필때가 됐으니 피었겠지.........
쑥부쟁이도 바지가랑이를 잡는다.
아내와 아들을 보내고 잠시 배낭을 벗었다.
산장도 가깝고
오늘 하루 무사할 것같은 예감에
길가에 핀 들꽃에 시선을 머문다.
다시 이 곳에
구절초와 쑥부쟁이가 폈다.
세석산장
먼저 도착해 좋은 자리 배정 받고
데크에 식사 준비 해놓으니
일행이 다리를 끌고 도착.
하지만 모습은 모두 의기 양양.
다행이다
참 다행이다.
모두 무사해서..........
산장의 잠자리..
거기서 새로운 경험을 얻는다.
상대를 위한 배려.
인내.
긴 밤은 그렇게 지났다.
이미 3시 이전 부터 깨어있었지만
5시 20분
일행을 안내하여 촛대봉에 오른다.
일출을 보러.
다음날 아침
뒤 돌아본 산장
촛대봉에 오르니 천왕봉을 가운데로
하늘이 물든다.
며칠전 제주에 다녀온 아들은
한라산길에 카메라를 놓고간걸 후회했다는데
오늘은 챙길건 보니
어느정도 나의 DNA가 흐르는가 보다.
산을 좋아하는.............
천왕봉과 일출
백무동 방면
보랏빛 하늘이.........
흉내 낼수 없는 빛.
달뜨기 능선 위로 하루가 시작되고........
덕유능선
이렇게 지리에서 하루를 맞는다
감격적인 하루를 .......
여전히 의연한 저 나무도 반갑다
일출 직전 이 순한 빛이 난 참 좋다
촛대봉일출을 맞고 장터목으로 향한다.
다행히 승유는 컨디션이 좋다.
덩달아 나도 좋다.
지리산에 오면 다 좋다.
꽃도
길도.
사람도.
꽁초바위옆 쑥부쟁이
바람이 지나는 길에.........
장터목에서........
일행을 기다리고
식사를 준비하고
두어시간을 머물다가
천왕봉으로 오른다
안개 구름에 쌓였던 하늘은
이제 안정을 찾으며
장엄한 모습을 연출한다.
숨이 막힌다.
술주정뱅이처럼
후둘거리는 손발을 진정시키며
저 모습을 잡아본다.
천왕봉으로 가는길에 가을꽃이 한창이다
천왕봉 가는 길
별 말없이 고도만 묻는 승유를 앞세우고
통천문을 지나 종주의 마지막 목적지
천왕봉에 섰다.
노고단에서 천왕봉
이틀간의 여정.
오랜 시일이 걸린 듯 착각이 든다.
휘몰아치는 안개구름에
이틀간의 고뇌를 날려 버리고.
지리산 주능 종주! 화이팅.
중산리
중봉과 하봉
바람은 순식간에 추위를 몰고 오고
1915미터에서
오래 머물수 없었다.
이틀간의 그 여정에도 불구하고.........
칠선을 내려다보며
"다음엔 칠선이다! 아들!"
별 말이 없지만 거부감도 없다.
내려가는 길
가족과 일행이 아니라면
좀 더 있고 싶었다.
한잔의 술도 없었고
그게 내려선 이유다.
이 모습을 가슴에 담고
장터목에서 백무동으로 향한다.
6킬로 남짓한 길.
망바위에서 반야봉을 발견하고
아들은 바로 알아본다.
이제 지리산의 형세를 희미하게 그기는 것 같다
내가 하고 싶은 말도
승유가 하고 싶은 말도
특별히 없다.
그걸 알았다.
그냥 늘 옆에서 말 없이 관심 갖고
바라만 보면 된 다는 걸.
관심과 배려.
세석산장 잠자리에서
덥고, 시끄럽고, 소란하던 그 2층 잠자리에서
잠 못 이루던 놈 손잡으니 바로 따라 내려오던..
1층 텅 빈 마루에서 우린 그렇게 편히 보냈다
장터목을 뒤로하고 백무동으로 가는 길
이틀간 뭉친 근육의 시험길이다.
소지봉을 지나
참샘으로 가는 바위 너덜길
앞서던 아들이 인내의 한계를 들어낸다.
아빠!
왜??
길이 뭐 이래??
응! 이 구간이 좀 그래.
언제까지 이래??
약 3킬로........
산길이 미친거 아냐??
ㅋㅋ
하동바위......
백무동에 오니 비가 또 내리기 시작한다.
지리산 종주! 끝.
종주길이 좀 약했나??
네가 이 세상을 살면서 오늘을 기억해줬으면 좋겠다.
아빠가...........